밋밋한 현실에 형광빛을 덧입히는 기발한 상상력
고재현 동화집 『천천히 안녕』은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의 일상에 집중해 그 안에 감춰진 형광빛 이면을 드러낸다. 교실이나 학원 같은 평범한 장소, 의자나 냉장고 등의 평범한 물건, ‘삼각관계’나 ‘인싸’ 혹은 ‘아싸’ 등으로 표현되는 익숙한 관계망은 작가의 시선을 통과하며 특별한 비밀을 드러낸다.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다채롭게 펼쳐지는 여섯 편의 동화는 어린이들의 일상을 세심히 재현하면서도 판타지적 요소를 적극 활용해, 한 편 한 편마다 짜릿함을 선사한다. 독자들은 우연히 벌어지는 이상한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며 확장되는 이야기에서 기묘한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오늘부터 1일!”
다양한 관계의 시작을 포착한 설레는 동화집
『천천히 안녕』에는 “오늘부터 1일!”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1일’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하다. 「자꾸 생각나」의 태영이에게 ‘1일’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행복과 슬픔이 동시에 올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첫날이고, 「불 꺼진 사이에」의 진주와 소혜에게는 같은 반이지만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 없던 어색한 관계가 따뜻하게 녹아내린 첫날이며, 「어디까지 왔니?」의 승연이에게는 멋진 길동무가 생긴 첫날이다. 동화 『꿈꾸는 행성』 『귀신 잡는 방구 탐정』 등을 통해 어린이가 맺는 관계의 재미와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 준 바 있는 고재현 작가는 이번 동화집에서 다양한 관계의 시작점에 주목하고 그 설렘을 골고루 엮어 내, 읽는 내내 기분 좋은 떨림을 선사한다.
편견의 벽을 부수는 가볍고도 유쾌한 돌팔매
표제작 「천천히 안녕」의 주인공 기욱이는 반려 거북이 ‘부기’가 죽자 그 시체를 냉장고에 넣어 둔다. 음식을 넣는 냉장고에 죽은 동물을 함께 두면 위생에도 보기에도 안 좋다는 엄마의 말에, 기욱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닭고기는? 돼지고기도 소고기도 모두 죽은 동물이잖아. (…) 닭은 머리도 자르고 배도 갈라 더 끔찍해. 하지만 부기는 멀쩡하단 말이야.” 안정된 문체와 짜임새 있는 극적 구조로 주목받아 온 고재현 작가는 이번 동화집에서 우리 내면에 자리한 선입견에 정면으로 충격을 가하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투명하지만 두꺼운 벽을 가볍게 깨트리는, 재기 발랄한 돌팔매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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