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감동
일본 그림책을 대표하는 이름,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책 시리즈의 세 번째 권 『아기가 온 날』(미디어창비)이 출간되었다. 『창가의 토토』 삽화로도 널리 알려진 이와사키 치히로는 수채화와 수묵화를 결합한 서정적인 화풍으로 일본뿐 아니라 세계에서 사랑받는 화가이자 그림책 작가다. 『아기가 온 날』은 1970년 처음 출간된 이래, 동생이 태어나는 어린이를 위한 선물로 줄곧 첫손에 꼽혀 온 일본 그림책의 고전이다.
새로운 탄생에 대한 기쁨이 넘실대는 순간
작품은 속표지에 앞서 동생을 낳기 위해 집을 비웠던 엄마가 돌아온다는 소식으로 시작한다. 오늘은 기다렸던 아기가 집에 오는 날. 며칠 동안 떨어져 지낸 엄마가 보고 싶을 법도 한데, 어린 누나의 마음은 온통 아기에게 쏠려 있다. 몇 살 터울이 진 동생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동생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책 속 아이는 지금 그 직전에 서 있다.
누나는 동생을 기다리며 아기에게 무엇을 주면 좋을지 골똘히 고민에 빠진다. 아직 만나지도 못한 동생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은 마음부터 먹는 아이의 모습에서 설렘이 전해진다. 그런 한편으로 여전히 내게 소중한 존재인 ‘곰돌이’는 동생에게 선뜻 주기에 망설여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밝혀지는 곰돌이가 내게 소중한 까닭은, 나조차 모르는 내가 아기였을 때를 곰돌이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신도 아기에게 그런 곰돌이 친구가 되고 싶다. 훗날 아기 역시 모를 테지만, 아기와의 첫 만남을 기다리고 오늘을 기억하는 ‘내’가 아기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아이의 마음은 저만치 앞서간다. 새를 보면 아기와 노래를 부르고 싶고, 나뭇잎을 보면 아기와 뛰어놀고 싶다. 누나는 주위 모든 것에서 동생을 떠올릴 만큼 기대에 차 있다.
깊고 넓은 어린이의 세계에 귀 기울이는 그림책
그러던 아이는 돌연 동생의 모자를 몰래 써 본다. 이 장면은 맏이가 되기 전, 외동아이인 채로 그가 누리는 마지막 행복이다. 손위 형제로서 의젓해져야 한다는 책임감 없이, 아이다운 호기심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단 한 장면뿐이지만, 이 잠깐의 응석마저 없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곰돌이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유아차를 밀고 가는 누나의 모습이 지금만큼 기꺼워 보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을 자신 있게 표지로까지 내세운 이면에는 실제 세 자매의 맏딸이기도 했던 작가가 세상 모든 첫째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응원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흔히 동생이 생기면 맏이가 샘을 내거나 토라지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이와사키 치히로는 어른의 지레짐작보다 깊고 넓은 어린이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동생을 맞아 뾰로통한 어린이의 모습을 그저 귀여워하며 웃어넘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에 호기심을 느끼고, 자기보다 어린 존재에게 소중한 것을 내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에 귀 기울인다. 새 생명을 주저 없이 환대하는 태도야말로 어린이다움의 일면이며, 거기에 바로 이 책이 반세기 동안 꾸준히 사랑받은 비결이 있다.
독자를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완성된 수작
그런가 하면 이와사키 치히로는 작가 노트에서, 이 책의 끝에서 세 번째 장면을 스스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 장면의 이해를 독자, 특히 어린이 독자에게 과감히 맡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작품을 독자가 완성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초대하며, 작가로서의 권위를 스스럼없이 내려놓는다. 평생 어린이를 믿은 것만큼이나, 독자를 향한 일관된 신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와사키 치히로는 독자뿐 아니라 함께 일한 편집자, 제작자를 존중한 것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림책 편집자이자 출판사 시코샤의 창립자이기도 한 다케이치 야소오와 의기투합해 펴낸 치히로 그림책 시리즈는 모두 7권으로, 한국에서는 2018년 12월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펴낸 『눈 오는 날의 생일』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선보여 2020년 여름 완간을 앞두고 있다.
목차